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루돌프 헤스 (문단 편집) === 구금 이후와 사망 이후 === [[파일: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.jpg|width=400]] ▲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, 양손을 책에 얹은 사람이 헤스이다. [[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]]에서는 [[소련]]의 강력한 요구로 영국에서 옮겨져 피고로 출석하게 된다. 당시 헤스는 심각한 [[기억상실증]] 증상을 보였으나 가끔씩 제정신으로 돌아올 때가 있었고 재판을 받아도 된다고 판단되어 결국 법정에 서게 된다. 거의 모든 전쟁 기간 내내 구금되어 있었으므로 [[전쟁 범죄]]와 반인도적 범죄로는 처벌이 불가능하여 무죄를 선고받았으나 전쟁 교사죄와 반평화적 범죄를 공모한 죄로 [[무기징역]]을 선고받았다. 한편 소련은 헤스도 [[사형]]에 처하고자 했으나[* 소련 입장에서 보면 헤스가 [[레벤스라움]]을 건설해야한다고 떠들어대고 다녔는데 그 레벤스라움 영역의 대부분이 소련인 걸 생각하면...] 이 정도로는 사형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다른 연합국 판사들의 반대로 무산된다. [[파일:루돌프 헤스의 말년.jpg|width=400]] 그리하여 전쟁 후엔 [[베를린]] [[슈판다우 교도소]]에서 살게 되었다. 그가 쓰는 모든 글과 편지들은 검열 당했으며 가족들의 [[면회]]는 한달에 30분밖에 허락되지 않았다가 나중엔 1시간으로 늘어났다. 그러나 정작 헤스는 1969년까지 가족 면회도 거부했다. 1970년대엔 이미 죽을 때가 다 됐고 더 이상의 형벌 집행 의미가 없는 그를 풀어줘 가족에게 돌려보내자는 의견이 영국과 미국에서 나왔지만 소련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되었다.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은 다른 두 인물인 [[에리히 레더]] [[제독]]과 [[발터 풍크]]는 50년대에 모두 석방되었다. 그러나 이들은 이미 석방 당시에 중병을 앓고 있어 언제 죽을 지 모르는 상황이었고 실제로 둘 다 몇 년 못 가 죽었으므로 굳이 수감 생활을 무리하게 지속하게 할 이유가 없었다. 게다가 이들은 죄질이 헤스에 비해서 낮았기 때문에 일찍 풀어준 것이다. 그러나 헤스는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도 무려 '''93세'''로 자살할 때까지 장수한 점에서 볼 수 있듯이 건강에 큰 문제가 없었으므로 건강 문제로 풀어주는 것도 불가능했다. 결국 원래 정원이 '''300명'''이던 그 넓은 슈판다우 교도소의 시설을 수십년간 혼자서 이용하게 됐는데, 나치즘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 슈판다우엔 관련 [[전범]]만 수감한다는 원칙이 이런 세금낭비를 초래해버렸다. 연합국이나 서독 정부 모두 헤스가 열악한 교도소 환경에서 90을 넘겨 장수하며 장장 40년간 세금을 축낼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 하고 금방 골골대다 죽을 거 같으면 다른 전범들처럼 적당한 시점에 가석방을 시켜 줘서 금방 교도소 문을 닫을 생각에 이리 했던 것이다. 그런데, 헤스는 골골대긴 커녕 정정한 몸으로 잘만 돌아다니고, 그렇다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기를 강요하면 또 [[인권]] 문제로 욕먹을까봐 늙어갈수록 의료 문제도 신경쓰는 등 처우를 조금씩 개선해야 했는데 이 또한 세금이었다. 게다가, 헤스는 반인륜 흉악 범죄와는 관련이 없고 교도소에서 난동을 부리지도 않고[* 사실 슈판다우의 수감자들은 모두 얌전히 지냈고 소란이라고 해봤자 고작 가끔씩 말다툼하는 정도였다. 그런데 헤스는 다른 수감자들과 거의 대화를 안해서 그나마도 없었다.] 인성도 괜찮은 모범수였으며, 나이도 들 만큼 들어서 교도소 측에서도 시간이 지날수록 교도소 내 대부분의 공간을 맘대로 다니게 하거나 딱히 일과표 준수를 강요하지 않는 등 편의를 봐줬다. 그래서 노년에는 사실상 밖으로 못 나갈 뿐 [[양로원]]이나 [[요양병원]]에서 사는 수준의 생활을 했다고 한다. 도망칠 능력도 없는 사람을 일일이 감시하고 통제하는 거 자체가 교도관 인건비나 보안 설비와 시설 유지보수비 등 세금 낭비 요인이 되기 때문이기도 했다. 헤스가 80줄에 접어들었을 때 취임한 슈판다우의 마지막 교도소장은 가끔 본인이 직접 헤스를 밖으로 데리고 나가 [[레스토랑]]에서 [[외식]]을 시켜줄 정도로 돌봐줬다. 대표적인 사례로, 1966년, 71살이 된 해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선 소내 정원에서 [[당근]], [[고구마]], [[해바라기]] [[농사]]도 지어서 [[원예]] 방면으로 상당한 실력에 이르렀다고 언급되어 있었다. 심심해서 씨앗 받아다 길러 본 모양인데, 상술했듯 모범수고 당시에는 꽤 고령인 71세라 죽을 때도 다 되었다 판단한 교도소 측에서도 노인 배려 차원에서 씨앗을 구해다 준 듯하다. 교도소 입장에서도 재소자가 이상한 짓 안 하고 저런 얌전한 취미를 즐기는 건 환영할 일이다. [[https://news.joins.com/article/1077199|출처]] [[대한민국]] [[교정본부]]에서도 징역형을 받은 이들 중 고령 혹은 소위 범털로 불리는 정재계 유명 인사 출신들에게 주로 부과하는 교도소내 노동이 바로 [[원예]]이기도 하다. 일이 크게 힘들지도 않으면서도 재소자의 심신 안정에도 꽤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. [[파일:external/efanzines.com/Prisoner7_age92a_s.jpg]] 1985년, 교도소 [[침대]]의 헤스. 91세. 결국 [[1987년]] [[고르바초프]] 때의 [[소련]]에서도 93세라는 헤스의 나이를 근거로 석방에 동의하게 되었으나 바로 그 해 헤스는 자신이 자주 찾던 교도소 내 정원의 가건물에서 목을 맨 시체로 발견된다. 다만 집으로 돌아갔다고 해도 너무 오래 갇혀 살았고 그렇다고 뭘 적극적으로 하는 스타일도 아니라 사회에 적응이 가능했을지는 의문이라, 차라리 이렇게 교도소에서 죽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. 이로써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 받은 인물들 중 유일하게 형기를 채운 인물이 되었다. 공식 발표된 사인은 [[자살]]. 그의 유족들은 [[타살]] 의혹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. 당시 헤스는 비록 나이에 비해 건강했지만 이미 90대의 나이로 내일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던 상태였던 데다 네오 나치들에게 숭배받는 것 외에는 이미 정치적 영향력도 상실한 상태였기 때문에 굳이 죽일 이유가 없었다. 무엇보다 정 죽여야 한다면 암살보다는 공식적으로 사형 선고를 내려 죽이는 게 훨씬 깔끔했을 것이다. 그의 사망에 대해 '''실제 헤스는 영국으로 가던 중 폭격으로 사망했고 감옥에 갇힌 헤스는 그의 대리'''라는 등 별별 음모론이 난무하고 있다. 헤스의 가족들조차 감옥에 갇힌 헤스의 존재를 인정했음을 고려하면 말도 안되는 소리. 죽은 뒤에는 장례를 치른 다음 [[교회]] 묘지에 묻혔고, [[네오 나치]]들이 성지화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 [[슈판다우 교도소]]는 마지막 수감자였던 그가 죽은 후 신속하게 철거되었다. 철거를 확인 사살하기 위해서 잔해는 대부분 바다에 뿌려졌다고. 하지만 그의 [[무덤]]은 항상 네오 나치들과 [[스킨헤드]]로 붐볐다. 정작 살아 생전의 헤스 본인은 그들이 자기를 그렇게 숭배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'''"멍청한 놈들"'''이라 중얼거렸다고 하는데, 네오 나치들을 '원조 나치즘을 왜곡시키는 자들'이라고 싫어했다고 한다. 2005년 [[바이에른 주]]에서 헤스의 묘에 단체 참배를 금지하는 [[조례]]를 만들었으나 통제 불능이었다. 결국 2011년 7월 20일, 네오 나치의 참배를 막으려는 바이에른 주정부의 결정에 따라 무덤이 철거되고 유해는 다시 장례를 치르기로 결정, [[화장]]되어 인근 호수에 뿌려졌다.[[http://flager8.egloos.com/2778522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